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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항쟁, 대한민국 최초 ‘반헌법적’ 국가권력의 명령

[여순항쟁70주년 주철희 박사 특별기고] '여순항쟁' 정명(正名)의 근거

  • 입력 2018.08.29 10:45
  • 수정 2018.08.30 20:36
  • 기자명 주철희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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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신문 <여수넷통뉴스>는 9월 3일자 회원 소식지 6호 지면 발간 특별기획 기사로 역사학자 주철희 박사의 특별기고문을 싣는다.
평소 '여순항쟁'  정명(正名)을 주장해온 주 박사 이번 기고문에서 '항쟁'의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70주년을 맞은 '여수순천 10.19사건'이 주 박사의 이번 특별기고문은 통해서 '여순사건'이라는 애매한 명칭보다는 구체적인 바른 이름(正名)으로 불려지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본지는 2018년 여순항쟁 70주년을 맞아 연초부터 관련 기획기사를 꾸준히 싣고 있다.  

 

1. 시작하면서

주철희 박사. <여수넷통뉴스> 자료 사진

대한민국 헌법이 제정되고,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여 70년을 오는 동안 숱한 인권유린, 국가권력의 일탈, 일명 국가폭력이 작용하였다. 아쉽게도 국가권력의 일탈에 대한 반성이나 성찰을 갖지 못한 채 여전히 국가주의에 따른 경제 논리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70주년, 여순항쟁 발발 70주년. 70년이란 시간을 되돌려 대한민국과 여순항쟁의 관계 속에서 파생되었던 일명 ‘대한민국 최초’란 타이틀로 여순항쟁을 독자와 함께하고자 한다.

 ‘최초’, ‘최대’, ‘제일’ 등과 같은 단어를 썩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대한민국 최초’란 타이틀을 쓴 것은 여순항쟁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와 인식을 확대해보고자 하는 의도에서 그러하였다는 것을 양해 바란다.

여순항쟁이란 용어 속에서는 여수와 순천이라는 지역명이 들어가 있다. 그러다 보니 여수와 순천이란 특정 지역에서만 발생한 사건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그 피해지역은 전남 전체와 전북과 경남 일부를 포함하여 37군데이다. 

그리고 여순항쟁은 대한민국 70주년을 걸어오는 과정에 숱한 발자국을 남겼다. 즉 현재 대한민국의 정치・사회에 미친 파장이 만만치 않다. 그런 점에서 여순항쟁을 제대로 아는 것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일부를 아는 것이다.

여기서는 여순항쟁과 대한민국 최초 ‘반헌법적인’ 명령이 작동했다는 문제를 다루겠다. 긴 글이니 차분하게 읽어 주기 바라며, 이 글의 목적은 여순항쟁에 대해 독자들과 그 공감대를 형성하고 인식의 폭을 높이고자 한 기고문이다.

 

2. 제14연대 병사위원회의 주장은 정당한가?

1948년 10월 19일 여수주둔 제14연대 군인들은 제주도 출동 명령을 거부하고 봉기하였다. 군인이 상부의 명령을 거부한 행위를 두고 여태껏 ‘반란’이란 족쇄를 채웠다. 상명하복의 가치가 절대적으로 적용되는 군인이란 특수한 신분이, 상부의 명령을 거부한 행위에 대해 일반 국민도 ‘반란’이라고 인식할 경향이 매우 크다. 일반인이 이러한 인식을 할 수밖에 없게 하였던 요인에는 반공주의와 군사주의 문화가 내재적으로 자리한 사회적 현상이 작동했기 때문이다.

반공주의를 마치 ‘국시(國是)’처럼 여겼던 문화를 터전으로 살아온 오랜 시간은 자신과 다른 시각이나 비판을 ‘틀렸다’고 정의하였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틀렸다’는 정의는 곧바로 이분법적 선택을 강요하였고, 그 선택에 기준은 반공주의 문화의 습성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특히 정치적 문제에서는 정부를 비판하거나 정책을 반대하는 데 인색할 수밖에 없었다. 

비판이나 반대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국민들로 하여금 애써 외면하는 것이 선(善)이라는 판단을 하게 이르렀다. 이런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우리 동네에서 ○○○을 모르면 간첩이지”란 말이 아무렇지 않게 통용되었다. ‘간첩’이란 단어가 의미하는 반공주의 문화 속의 엄청난 파장을 고려할 틈도 없이 자연 발생적으로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였다.

군사주의 문화가 사회 전반에 내재한 오랜 시간. 이는 군대를 다녀온 사람이나 다녀오지 않은 사람이나 대부분이 “군인은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다”는 관성적인 습성이 자연적으로 체화된 상황을 의미한다. 

분단국가 그리고 전쟁이 발발했던 요인으로 남북 간의 이념 투쟁이 격화되면서 ‘안보’를 제일의 가치로 여겼던 인식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면서 발생한 문제이다. 그런 점에서 군인은 상부의 명령이라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그 명령을 무조건 따라야 할까?

    1) 국군의 사명은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이다.

여수 주둔 제14연대 군인들은 제주도 출동을 거부하며 자신들을 ‘제주도토벌출동거부병사위원회(이하 병사위원회)’라고 칭하고 「애국인민에게 호소함」이란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 성명서는 누런 종이에 붓으로 썼으며 여수 시내 거리 곳곳에 부착되었다. 병사위원회의 유일한 문서라는 점에서 유의미한 사료라고 본다. 그 내용을 보면,

제주토벌을 거부한 병사들의 호소문

㉠ 우리들은 조선 인민의 아들 노동자, 농민의 아들이다. 우리는 우리들의 사명이 국토를 방위하고 인민의 권리와 복리를 위해서 생명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 우리는 제주도 애국인민을 무차별 학살하기 위하여 우리들을 출동시키려는 직전에 조선 사람의 아들로서 조선 동포를 학살하는 것을 거부하고 조선 인민의 복지를 위하여 총궐기하였다.

1. 동족상잔 결사반대 2. 미군 즉시 철퇴 (󰡔동아일보󰡕, 1948년 11월 30일)

 

제14연대 군인들은 “우리는 우리들의 사명이 국토를 방위하고 인민의 권리와 복리를 위해서 생명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고 했다. 즉 군인의 사명을 언급하고 있다. 

병사위원회가 주장한 군인의 사명은 첫째 국토방위이다. 둘째는 인민의 권리와 복리이다. 이 주장은 국군의 사명과 부합한 것일까?

1948년 7월 17일에 제정한 대한민국 헌법을 살펴봐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은 1948년 7월 12일 제정하여 7월 17일 공포하였다. 헌법이 공포된 7월 17일을 제헌절로 부르고 국가기념일로 지정하였다. 제헌헌법은 전문과 본문 10장 130조, 부칙으로 구성되었다. 

제헌헌법 제53조 “대통령과 부통령은 국회에서 무기명투표로써 각각 선거한다”는 규정에 따라 7월 20일 국회에서 간접선거로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시영이 당선되었다. 이승만 초대 내각이 구성되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포하였다.

대통령에 관한 규정은 제헌헌법 제61조이다. “대통령은 국군을 통수한다. 국군의 조직과 편성은 법률로써 정한다”고 규정하였다. 대통령 취임 선서(제54조)는 “나는 국헌을 준수하며 국민의 복리를 증진하며 국가를 보위하여 대통령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에게 엄숙히 선서한다”고 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방장관에 이범석을 임명하여 국무총리직을 겸임케 했다. 국군 통수권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있으며, 군대의 통할을 국방장관 이범석에게 부여하였다. 

헌법에서 대통령에게 국가를 보위하는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면서(헌법 제54조), 그에 따라 국군 통수권을 대통령에게 부여했다(제61조). 이는 현재의 제6공화국 헌법도 마찬가지이다.

대통령이 ‘국가의 보위’란 중책을 맨손으로 수행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혼자서 할 수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국가 보위’의 최후 보루로 군대를 두었다. 이것이 국군이며, 군인이다.

국군은 국가 보위의 최후의 보루인 만큼, 헌법에는 국군의 사명을 명확하게 명시하고 있다. 물론 제헌헌법에도 마찬가지이다. 제헌헌법 제6조 “대한민국은 모든 침략적인 전쟁을 부인한다. 국군은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를 수행함을 사명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를 국군의 사명으로 헌법에 명시하였다.

앞서 제14연대 군인들은 두 가지 국군의 사명을 주장했다. ‘국토방위’와 ‘인민의 권리와 복리’이다. 두 가지 중 제헌헌법에 명시된 국군의 사명과 ‘국토방위’는 일치한다. 그렇다면 제14연대에 제주도 출동 명령을 하달할 시기에 제주도가 국토방위의 심각한 위협을 받았는가? 아니면 국토방위를 목적으로 제14연대를 출동시켰는지를 확인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먼저 당시 제주도가 다른 국가로부터 특히 북한으로부터 위협 등 심각한 상황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껏 알려진 바가 없다. 알려진 바가 없다는 것은 심각한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으로도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적으로는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국토방위의 목적으로 제14연대에 제주도 출동 명령이 하달되었을 수 있다. 안타깝게도 제14연대 출동은 국토방위보다도 제주4・3항쟁의 토벌을 목적으로 출동명령이 내려졌다는 것이 지금껏 연구 결과이다. 이는 계속 이야기가 될 것이다.

   2) 국군은 사명은 ‘인민의 권리와 복리’이다.

병사위원회가 국군의 두 번째 사명으로 인식한 ‘인민의 권리와 복리’는 어떻게 된 것일까? 

당시 제헌헌법에는 국군의 사명에 명시되지 않았다. 그 근거는 현행 제6공화국 헌법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제5조 ① 대한민국은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하고 침략적 전쟁을 부인한다. ② 국군은 국가의 안전보장과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를 수행함을 사명으로 하며, 그 정치적 중립성은 준수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제헌헌법과 달리 현행 제6공화국 헌법에는 ‘국가의 안전보장’이 국군의 사명으로 추가되었다. 근대 국가의 요소는 영토, 국민, 주권이다. 영토에 대해서는 ‘국토방위’ 규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국가의 안전보장’이란 국민의 생명이 위협받거나 주권이 위태로운 상황을 염두에 둔 법률적 근거라고 볼 수 있다.

국민의 생명이 위협받는다고 매번 군인이 출동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은 치안 문제일 경우가 대부분이며, 이는 경찰의 임무이기도 하다(경찰법 제3조 국가경찰의 임무). 군인의 출동은 다수의 국민 생명이 위협받을 수 있으며, 특히 경찰로서 국민 생명을 지킬 수 없을 정도의 아주 심각한 상황이 도래했을 때 군인이 나서서 국민의 안전을 확보하고 사회질서의 안녕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헌정 70년에서 국군이 투입되어 국민의 안전을 지킨 사례는 있었던 것일까? 대한민국에서 전쟁, 대규모 간첩 침투, 해외에서 국민이 납치된 경우를 제외하고 국군을 투입하여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다만, 1979년 부마항쟁과 1980년 광주민주항쟁에서처럼 일부 지배 권력의 망동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지역에서 “유신정권 물러가라”, “정치탄압 중지하라”란 반정부・반독재 집회에 대해 부산에 비상계엄 선언, 창원마산지역 위수령을 선포한 공수부대 등을 투입하여 군대의 힘으로 진압하였다. 이때 계엄령과 위수령 그리고 공수부대 투입은 박정희 유신정권의 연장을 위한 조치였지, 국민 생명이 심각하게 위협받아 취한 조치가 아니었다. 이를 ‘부마민주항쟁’이라고 한다..

1980년 5월 광주민주항쟁도 마찬가지이다. 5월 17일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의 전국비상계엄 확대 조치와 광주에 공수부대를 투입한 것은 국민의 생명과 무관하다. 

사회질서의 안녕과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신군부의 정권을 유지하려는 일련의 조치에서 피의 학살극을 자행했다. 즉 국군의 사명과 부합하지 않은 자국민의 생명을 위해(危害)하는 행위를 국군이 서슴지 않았던 것이 광주민주항쟁이다.

부마민주항쟁과 광주민주항쟁에 국군의 투입은 지배 권력자의 망동으로 역사는 기록하였고, 대한민국 정부도 법률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하여 법률적 단죄를 내렸다. 

부마항쟁과 광주민주항쟁과 달리 국군이 정반대적 입장을 취한 사건이 있다. 지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자국민의 생명을 심각하게 위해하는 명령. 이를 거부한 국군이 있었다. 1948년 10월 19일 여수주둔 제14연대 군인이다.

아이러니하다. 부마민주항쟁과 광주민주항쟁처럼 국군이 투입된 사건에 대해서는 특별법을 제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배 권력자의 망동을 거부한 사건에 대해서는 특별법을 제정하지 않고 있다. ‘반란’이란 족쇄를 채워서 말이다. 

1948년 10월 19일 여수주둔 제14연대 군인들은 ‘반란’을 목적으로 제주도 출동 명령을 거부했던 것일까?

군인토벌 작전

     3) 동포의 학살을 거부한다.

다시 병사위원회의 「애국인민에게 호소함」을 살펴보자. 이들이 제주도 출동을 거부한 것은 “우리는 제주도 애국인민을 무차별 학살하기 위하여 우리들을 출동시키려는 작전”으로 간주하였다. 병사위원회의 주장이 옳다고 가정하면, 분명 제주도 출동 명령은 잘못된 것이다. 어떻게 자국의 군대가 자국민을 학살할 수 있다는 말인가. 여기에는 대부분 동의할 것이다.

그렇다면 따져야 할 것은 제14연대의 제주도 출동 목적이 정말로 “제주도 인민을 무차별 학살하려”는 작전의 일환이었느냐는 것이다. 병사위원회의 주장에 신빙성이 있냐를 따져봐야 한다.

현재까지 정부나 국방부에서 제14연대를 왜 제주도에 출동시키려고 했는지에 대한 ‘작전명령’ 문서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혹여 국방부는 그런 것은 없다고 주장하거나 소실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대병력을 투입하면서 그런 것이 없다는 것은 말이 될 수 없다. 또한 여순항쟁을 토벌하는 ‘전투경과지도’, ‘군법회의 자료’ 등 숱한 자료가 존재한다. 그런데 유독 ‘작전명령’ 문서만 소실되었다는 것은 언어도단에 불과할 것이다.

정부와 국방부가 제14연대를 왜 제주도 출동시키려고 했는지에 대한 문서를 공개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당시 다른 사료와 여러 정황을 종합하여 병사위원회의 주장이 타당한지 따져볼 수밖에 없다.

 

3. 제주도 출동명령은 정당하였는가?

1) 어떤 선결조치도 없이 군대의 출동명령이 있었다.

먼저, 부마민주항쟁과 광주민주항쟁에서 군을 투입할 경우 ‘선결조치’가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비상조치 또는 계엄 등을 말한다. 단, 당시 비상계엄이 정당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계엄령에는 비상계엄과 경비계엄이 있다. 부마민주항쟁과 광주민주항쟁에는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현행 계엄법 제2조(계엄의 종류와 선포 등)에는 “비상계엄은 대통령이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 시 적과 교전 상태에 있거나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되어 행정 및 사법 기능의 수행이 현저히 곤란한 경우에 군사상 필요에 따르거나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선포한다”고 정의되어 있다.

부마민주항쟁과 광주민주항쟁에서 군을 투입할 명분을 만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한 것이다. 그렇다면 제14연대의 제주도 출동명령을 하달한 시점에 제주도에도 비상계엄 또는 경비계엄이 선포되었는가?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혹여 당시에 계엄법이 존재하지 않아 계엄령을 내리지 못했다고 강변할 수도 있다. 계엄법이 제정된 날은 1948년 11월 24일이다(법률 제69호). 일리가 있다고 고개를 끄덕일지 모르겠지만, 여순항쟁이 발발하고 여수, 순천지역에 10월 22일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계엄령이 존재하지도 않았음에도 계엄을 선포한 것이다. 물론 제주도도 마찬가지로 계엄법이 없었음에도 1948년 11월 17일 계엄을 선포했다.

무장한 군인을 제주도에 출동시키려고 했다면 그에 상응한 조치가 있어야 했다. 비상계엄이든 경비계엄이든 간에 말이다. 그런데 어떠한 비상조치도 선포되지 않았다. 이 말은 제주도가 그다지 심각한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고로 토벌을 목적으로 국군의 출동은 ‘제주인민의 학살’이라는 병사위원회 주장이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2017년도 여순사건 위령제 광경

2) 군인은 무조건 명령을 따라야 하는 신분인가?

두 번째, 특수한 신분의 군인은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다고 하지만, 부당한 명령까지 실행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무조건 군인은 명령을 따라야 하는 것이 정당한지 살펴보고자 한다. 군형법 제44조에는 ‘항명(抗命)’이라는 죄가 있다(1962년 1월 20일 제정). 

여순항쟁 당시에는 군형법이 존재하지 않았지만, 국군의 규율을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항명’의 일반적인 사전적 의미는 “명령이나 통제에 따르지 않고 맞서서 반항함”이라고 되어 있지만, 군형법에는 “제44조(항명) 상관의 정당한 명령에 반항하거나 복종하지 아니한 사람”에게 주어진 형벌이다. 제44조는 개인의 행동에 국한한 경우라면, 제45조는 집단항명을 정의하고 있다. “제45조(집단항명) 집단을 이루어 제44조의 죄를 범한 사람”이라고 개념을 정하고 있다.

국군은 개인에게 또는 집단이든 상관은 정당한 명령을 내려야 한다는 것을 군형법 제44조가 입증하고 있다. 즉 이는 정당한 명령이 아닐 경우에는 그 명령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법률이다. 그런데 군사주의 문화가 팽배한 우리 사회는 군인은 무조건 명령에 따라야 한다고 한다. 이러한 견지가 깊숙이 내재한 속에서 제14연대 군인의 출동명령 거부 행동에 대해서 생각해볼 가치도 없이 ‘반란’이란 족쇄를 채웠다. 극단적인 국가주의와 반공주의 광기어린 프레임이 작용한 현상이다.

상하 위계질서가 군인과 다르지 않은 경찰을 통해 제14연대 군인의 행동이 정당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항명죄에 해당한 행동이었는지 판단해보고자 한다. 

다시 1980년 5월 광주를 떠올려 보자. 당시 전남경찰국장(현 전남지방경찰청장)이었던 안병하는 계엄사령관의 “경찰이 무장하고 도청을 접수하라”는 명령을 거부하였다. 

오히려 안 국장은 “경찰은 시민군에 형제, 가족도 있을 테고 이웃도 있는데 경찰이 무기를 사용하면서까지 할 수 없다”면서 시민의 안전을 최우선에 두었다. 당시 신군부는 안병하 국장을 1980년 5월 26일 직위해제하고 후임에 송동섭 치안본부 작전과장을 전남경찰국장으로 발령하였다. 

안병하 국장은 지휘권 포기 및 직무유기 혐의로 체포되어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에 끌려가 8일간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으며, 그 고문의 후유증을 겪다 1988년에 사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980년 전남도경 국장 안병하는 당시 행동이 정당하게 인정되어 2006년에 국가 유공자로 인정되었으며, 경찰 사상 처음으로 2017년 올해의 ‘대한민국 경찰 영웅’으로 선정했고, 경무관에서 치안감으로 추서하였다. 1980년 당시에 명령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고문을 당했던 사람이 이제는 국가유공자이며, 대한민국 제1호 ‘경찰 영웅’이 되었다. 

다시 말하면 1980년 당시 안병하의 ‘항명’은 정당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명령을 내린 자들은 처벌되었다. 부당한 명령에 대한 역사의 심판이었다.

여수사건 당시의 광경

3) 국군 수뇌부는 제주도 상황을 어떻게 인식했는가?

세 번째, 당시 국방부 수뇌부가 제주도 상황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에 대해 살펴봐야 할 것이다. 6월 18일 박진경 암살 이후 새로 부임한 최경록 제11연대 겸 제9연대 연대장은 임무를 마치고 수원으로 귀환하면서 담화를 남겼다. 

그 담화는 “제주도 사태 수습에 있어서 무력 해결로써는 절대 불가능하다”고 역설하였다. 또한 함께 귀환한 김용주 제3대대장은 제주4・3항쟁의 상황과 원인으로 “부락에는 가축만 남아 있고 대개가 산으로 도망하고 없다. 이는 경찰의 탄압과 폭도들의 유인이 원인이다”고 하였다. 

폭도들의 유인도 있었겠지만, 경찰의 탄압으로 제주도민이 산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최경록 연대장의 당시 제주도 상황 인식은 한 신문의 사설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사설을 요약하면 “단순히 무력에 의한 토벌 그것만으로는 해결을 기약키 어려운 점은 현지의 국방경비대며 경찰의 책임자가 누누이 지적하였다”면서 “일찍부터 정치적 비상수단을 베풀 것을 군정 당국에 경고한 바 있었다”고 하였다. 

특히 군의 토벌작전은 최후 수단이 되어야 하며, 이는 비상대책을 마련하여 병행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군의 행동은 어디까지 동원된 본정신과 애족애국의 군 본래의 사명에서 사건 수습의 주도적 기능을 발휘케 하여야 할 것이었다”고 강조하였다.

제주도 주둔 제9연대는 부산 제3여단에서 1948년 8월 8일에 광주 제5여단 예하부대로 소속이 바뀌었다. 제5여단장 김상겸 대령을 대리하여 참모장 오덕준(吳德峻) 중령은 8월 30일 제주도에 도착하여 제주 상황을 점검했다. 그는 제주도에서 기자들과 간담회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제9연대가 제5여단 관하로 소속된 후 본도 순시와 아울러 본도 사태를 조속히 해결코자 함이 본관이 내도한 제일 목적이다. 제주도 사태는 어느 정도 수습되고 있으므로 군으로서는 사태 수습의 방법을 완화책에서 구할 것이며, 그 단계로 선무 등을 적극 전개하며 동요 중에 있는 도민들의 민심을 수습코자 하고 있는데 벌써 군의 의무반이 농촌에 나가서 활동을 전개한 결과 지방의 민심 수습에 현저한 성과를 얻었다(󰡔동아일보󰡕, 1948년 9월 7일).

 

오덕준은 8월 30일 비행기로 제주도에 도착, 일주일간 제주도 사태에 대한 보고와 함께 현지를 시찰하며 상황을 파악하였다. 오덕준이 본 제주도는 어느 정도 수습되고 있었다. 

군은 선무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여 민심을 수습하는 것이 방법이라고 했다. 군 의무반 등이 농촌에서 선무활동을 전개한 결과 현저한 성과를 내는 것을 오덕준은 확인하였다. 

강경 진압작전보다 선무활동의 전개를 통해 제주도 상황을 수습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파악하였다. 

또한 오덕준은 “도민들의 왕성한 근로정신은 모두가 본받아야 할 점이다. 나는 앞으로 건군에 있어 근로정신을 모범하도록 할 작정이며 광주로 돌아가 제주도에 대한 인식을 철저하게 할 것이다” 하면서 제주도민의 왕성한 근로정신에 큰 감동을 하였다. 

오덕준이 본 제주도 상황은 군인을 투입할 이유가 전혀 없음을 증명하고 있다.

9월 초순으로 들어서면서 제주도는 유격대의 활동이 재연될 기미가 나타났다. 국방부에서는 육군 총참모장 정일권(丁一權) 대령과 해군 총참모장 김영철(金英哲) 대령을 10월 1일 현지로 파견하였다. 5일 동안 현지를 시찰하고 돌아온 정일권 대령은 “제주도의 현 사태는 예상했던 것보다도 평온하다”고 제주 상황을 전했다. 

유격대의 치고 빠지는 전투(빨치산전)가 9월 초순부터 숫자상으로 많아졌지만, 평온하다고 한 것으로 보아 그렇게 큰 문제로 보지 않았다. 정일권은 군대가 제주도에 파견되어 있으면서도 완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음을 국민에게 미안해하면서 조속히 해결하겠다는 약속도 덧붙였다.

만성리 입구 여순사건 희생자 위령비

4. 마무리하면서

당시 제주도에 다녀온 국방부 군 수뇌부는 제주 상황을 낙관적으로 적시하였다. 특히 제주도 제9연대의 상급부대인 제5여단 오덕준 참모장의 경우 제주도민의 왕성한 근로정신을 육지에서도 적용하겠다는 의지까지 피력하였다.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굳이 군대를 꼭 제주도에 출동시켜야 할 상황이었는지를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제주도 상황이 급박할 정도의 사회 안녕질서 유지에 국군의 투입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면, 정부는 비상조치를 발동했을 것이다. 즉 계엄령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 어떤 비상조치도 없이 초토화 작전에 돌입한 것이다.

제14연대의 제주도 출동은 법률적인 문제를 따져도 모순의 연속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왜 이승만 정부는 제14연대를 제주도에 출동시켜야만 했던 것일까? 

병사위원회는 자신들의 제주도 출동을 제주도 동포의 학살로 보았다. 이미 박진경 중령을 내려보내 강경진압작전으로 수많은 제주도민이 학살된 전철이 반복될 것이라는 징조, 아니 그것보다 더 훨씬 무법적인 초토화 작전이라고 인식하였다.

자국민을 학살하라는 제14연대 제주도 출동은 헌법에서 명시하고 있는 국군의 사명과 전혀 부합하지 않은 반헌법적인 명령이었다. 따라서 제14연대 제주도 출동명령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최초의 반헌법적인 사례였다는 것을 역사가 기록해야 할 것이다. 

역사는 기록하고 기억할 때 교훈을 얻을 것이고, 심판이 가능할 것이고, 새로운 창조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이 기고는 <여수신문>에도 함께 기고했습니다)

필자 주철희(朱哲希) 박사

여수출신으로 전북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여순항쟁을 비롯한 국가폭력과 반공문화를 집중 연구하고 있으며,  지역의 근현대사도 정리 중이다.  학계에서는 도발적인 문제제기와 문제의식으로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그동안 저서로는 『동포의 학살을 거부한다』 , 『불량 국민들』 , 『일제강점기 여수를 말한다』 가 있고 공저로는 『주암호의 기억 』 , 『인물로 본 전라도 역사이야기』 , 『지리산의 저항운동』 , 『여순사건 자료집Ⅰ~Ⅳ』 등이 있다.

논문으로는 「예술작품을 통해 본 여순사건 연구」 , 「여순사건 주도인물에 관한 연구」 , 「고초도 위치 비정에 대한 재검토」 , 「여순사건과 지역의 기억」 , 「빨치산 사령관 ‘이영희’의 삶과 투쟁」 , 「한국전쟁 전후 반공문화의 형성과 그 의미」 등이 있다.
최근 여수MBC 창사 특집 대담프로그램 ‘여순70주년 - 그 아픔과 선율’(8월 27일 방영. 바로보기>>>>)에 출연해 대중문화 속에 나타난 여순사건을 상세히 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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